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스크바 공방전 (문단 편집) === [[동장군]]의 도래 === 10월 13일까지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은 모스크바에서 불과 120km 떨어진 모자이스크 방어선에 도달했다. 이곳에는 9만 명의 소련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방어선을 뚫으며 계속 전진하였으나 진흙뻘로 변한 도로 탓에 진격이 늦춰져 2주가 지난 10월 26일에야 툴라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소련군과 민간인 지원병들의 맹렬한 저항에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10월 29일에 독일군의 진격은 저지되었다. 11월 7일, 스탈린은 독일 공군의 공습 위협에도 불구하고 군과 민간인들의 떨어진 사기를 보양하기 위해 [[붉은 광장]]에서 [[10월 혁명]][* '10월' 혁명인데 행사를 11월에 하는 이유는 소련에서만 쓰던 율리우스력과 보편적으로 쓰는 그레고리력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 [[2월 혁명]] 역시 3월 혁명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기념 군사 [[퍼레이드]]를 강행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퍼레이드에 참석하는 각 부대에는 퍼레이드가 열리는 당일에야 이 사실을 알렸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붉은 광장에는 의료진들이 대기했다. 다행히 눈보라가 날리는 등 기상 상태가 나빠지면서 독일 공군의 공습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기념 연설에서 "우리의 대의는 정의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혁명 후 금기시되었던 러시아인의 애국주의에 호소했다.[* 원래 소련 시절에는 볼셰비키 혁명을 기념하여 11월 7일에 모스크바에서 열병식을 개최했으나, 이후 소련이 해체된 후 볼셰비즘과 무관한 러시아 연방이 성립되었어도 이 모스크바 방위전 승리 기념을 명목으로 1995년부터 계속 11월 7일마다 '명예 퍼레이드'란 이름으로 열병식을 개최한다. 하지만 모스크바 시 차원의 행사이고, 러시아에서는 공휴일은 아니다.] 이와 함께 많은 군가를 작곡한 것도 애국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 이를 통해 사기는 어느 정도 고양되었고, 이를 본 스탈린은 주코프와 바실렙스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담한 반격 작전을 계획했으나 모두 독일군에게 격퇴되었고, 소련군의 예비 병력만 소모시킬 따름이었다. 그 즈음 독일군은 수적으로는 소련군보다 2배정도 많았고, 질적으로도 소련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그 동안 용의주도하게 구축된 다중 방어망에 포진하고 있었고, 지형 상으로 10월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기온은 점점 떨어지면서 영하 20도 근처로 급강하했다. 땅은 얼어붙어서 독일 기갑 부대 지휘관들은 전차가 드디어 움직일 수 있다고 좋아했으나, 여름 군복만 입은 독일군 병사들은 추위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차량 등의 중장비도 부동액이 없는 등의 이유로 인해 점차 엔진을 거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의 전설적인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로부터 [[일본 제국]]이 소련을 침공하지않고 [[미국]]을 [[진주만 공습|공격할거]]라는 첩보를 받은 스탈린은 즉시 동부 전선에 있던 소련군 부대 30개 사단을 제외한 전부를 모스크바로 집결시켰다. 심지어 이 소련군 부대들은 혹독한 날씨에도 잘 적응되고 무장 수준도 높았던 정예부대들이였다. 구데리안은 "신속히 동복을 보급 바람"이라고 중부집단군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사령부는 "앞으로는 이러한 불필요한 요청은 하지 말 것"이라는 답변만 보내올 뿐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10주만에 소련을 정복하겠다는 작전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미처 동복을 준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일단 겨울을 소련에서 보내야 하므로 나름대로 월동 장비를 장만했지만 수량이 부족한 데다가 소련의 혹독한 겨울을 반영하지 않은 빈약한 장비였고, 결정적으로 [[광궤]]를 사용한 소련의 철도 설비를 제대로 [[표준궤]]로 개궤하지 못해서 연료와 탄약, 식량 같은 기본 보급 물자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월동 장비가 아직 [[폴란드]]에 못박혀 있었다. 그래서 독일군은 점점 거세지는 소련군의 저항 외에도 이런 동장군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ttachment/0069dpty.jpg|width=100%]]}}} || || 여름 군복을 입은 독일군 포로들 || >굶주리고 헐벗은 병사들이 초라한 오두막을 두고 싸우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었다. - [[하인츠 구데리안]]의 회고록 중 해당 겨울이 유별나게 추운 것은 아니었으며, 사실 당시 모스크바 근교의 온도가 세계사적으로 유례없이 추웠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모스크바의 기온은 가장 추웠을 때가 야간 영하 21도, 주간 영하 12도였으며 평균 영하 17도 정도였다. 이것은 6.25 전쟁의 [[장진호 전투]][* 평균 영하 35도, 최저 야간 영하 41도.]에 비하면 거의 초겨울 수준의 추위에 불과했고, 현대 한국의 서울 한겨울 기온보다 조금 추운 정도일 뿐이다.[* 물론 서울의 겨울이 동일한 위도의 어떤 도시보다도 압도적으로 춥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긴 한다.] '''그러나 독일군은 하계 전투복을 입은 병력이 80%를 넘길 정도로 어떤 동계장비도 없었다. 바로 이것이 패망의 시작이었다.'''[* 다수의 독일군 장성들이 전후에 "너무 추워서 패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대부분 거짓말인 이유다. 동계장비만 충분했다면 넘기기 어려운 겨울도 아니었다.] 동계 장비가 부족한 독일군은 수십만 명의 [[동상]] 환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작전지로 [[서유럽]]만을 고려한[* 서유럽은 겨울철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기에 혹한에 대비할 필요가 적었다.] 독일군의 무기들은 이런 혹한 때문에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전차의 조준경은 얼어붙었고, [[소총]]과 [[권총]] 역시 얼어붙어 방아쇠를 당기기도 어려웠으며, 윤활유는 굳어 버려서 트럭은 1시간 동안 예열시켜야 했고, [[포신]] 안에도 얼음이 달라붙어 포격이 불가능해졌다. 보급 용도로 여전히 다수를 이용했던 군마도 상당수가 얼어 죽었다. 독일군의 유일한 희망은 전사한 소련군 장병의 시신에서 동복을 벗겨내는 것이었으나, __동복도 시신과 얼어 붙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심지어는 톱으로 시신의 팔다리를 자르고 솥에서 끓인 후 장갑이나 장화를 벗겨냈다.__ 그래서 부상병들은 자신이 부상당하면 신속하게 동복을 벗어 동복이 없는 전우에게 주었다고한다. 또한 옴, 이질, [[발진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여 전투와 추위 외의 질병으로도 많은 병력이 사망하였다. 심지어 설사병으로 하루에 설사를 30번이나 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이런식으로 설사를 너무 많이 하면 몸에 있는 수분이 너무 많이 빠져나가므로 당연히 몸에 큰 문제가 생긴다.] >잘 선택하라. 바지를 벗으면 얼어 죽겠지만 바지 뒤쪽의 솔기[* 천조각을 꿰멘 이음새를 말한다.]를 뜯어 놓으면 바지를 벗을 필요가 없다.[* 설사를 자주하니 바지벗다가 얼어죽지 말고 그냥 솔기를 뜯어두라는것이다.] >-독일군 [[군의관]] '하프' 박사 뿐 만 아니라 소련 공군을 박살내며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던 [[루프트바페]]도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야전 비행장에서 마땅한 방한 장비도 없는 채 전투기들이 그대로 주기되느라 엔진이 망가지기 시작했고 부득이하게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공회전|엔진을 상시 가동해야 했다.]] 이는 연료의 소모를 야기했고 공중전 싸움에서 불리한 요소가 되었다. 독일군의 전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모스크바에서 불과 30km 떨어진 [[힘키]]까지 진격했다. 이곳 버스정류장 노선표의 종착역은 '''[[붉은 광장]]'''이였다. 전시에 버스가 다니진 않았지만 독일군 정찰 부대는 망원경으로 크렘린 궁전의 첨탑을 볼 수 있었고,이것이 독일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크렘린]]이었다. 12월 5일 구데리안은 정지를 명령했고 다른 방면의 독일군도 진격의 한계에 이르러 멈추게 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독일군이 최대로 진격한 지점인 힘키에 있는 [[https://maps.app.goo.gl/YTzLiGhQEPjymQ8E9|문제의 버스정류장 자리에는 현재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 있으며, 정확히는 [[이케아]] 매장쯤 되는 자리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